Committed

디디에 베르토(BD 앰버서더)가 코브라 크랙을 등반하고자 20년의 긴 여정을 떠났습니다.

저는 크럭스 구간에서 거의 추락할 뻔했습니다.
오버행 구간의 언더컷 모노 포켓*에 손가락이 너무 얕게 걸리는 순간, 떨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습니다. 정확성이 요구되는 까다로운 홀드였지만, 그 순간 제 동작은 그만큼 정교하지 못했던 거죠.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내면 깊은 곳의 강한 의지를 끌어올려 불리한 상황을 극복했습니다. 다시 몸을 끌어당겨 홀드를 고쳐 잡고, 핑거락 홀드로 팔을 뻗으며 머릿속의 모든 생각을 지워 버렸습니다.

* 언더컷 모노 포켓(Undercut Mono Pocket): 손가락 하나를 아래로 기울어진 작은 구멍이나 크랙에 끼워 넣은 뒤, 이를 지렛대 삼아 몸을 위로 끌어당겨야 하는 홀드.
저는 완등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성공했을 때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올 기대감, 조급함, 그리고 수많은 연결된 생각들이 단 1초 만에 이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을 끄기로 했습니다. 오직 등반에만 100% 집중하며, 고도의 몰입 상태에서 마지막 기술 동작들을 수행했습니다.

제 등반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압박감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여기서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제 마음속에 들어올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침내 코브라 크랙의 정상에 서 있었습니다. 정말 마법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만 같은 희박한 확률의 순간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사실 코브라 크랙과의 제 여정은 19년간 실패와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코브라 크랙에 도전했던 첫 시즌에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비였습니다. 저는 두 달 동안 스쿼미시에 머물렀고, 그 시간 동안 ‘스쿼미시’라는 이름은 곧 ‘비’를 의미했고, 비는 곧 젖은 크랙을 뜻했습니다. 계속되는 악천후에 제 정신은 점점 지쳐갔고, 결국 빈손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해 저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도착한 지 사흘 만에 오래된 무릎 부상이 재발했고, 목발을 짚은 채 스위스로 돌아가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 여러 사건이 겹치면서 저는 13년 넘게 암벽을 만지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제 마음속에서 코브라 크랙은 더 이상 등반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저 아득한 기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인생사가 그렇듯, 저는 결국 2019년에 다시 등반을 시작했습니다. 2022년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스쿼미시로 이주했습니다. 코브라 크랙은 제 집 뒷마당의 일부가 되었고, 등반 실력도 향상되었죠. 다음 해, 저는 마침내 다시 도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막 '크랙 오브 데스티니(Crack of destiny)’ 라는 고난이도 크랙 루트를 완등한 직후였기에, 당시 제가 ‘그분’이라 칭하던 코브라 크랙도 이제는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는 코브라 크랙이 두려웠습니다. 실패 자체도 무서웠지만, 무엇보다 또다시 실패했을 때 사람들이 저를 바라볼 그 시선이 더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실제 등반은 의외로 수월하게 느껴졌습니다. ‘크랙 오브 데스티니’를 준비하며 쌓은 훈련과, 새롭게 알게 된 힐훅 베타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시도에서 마지막 홀드를 잡으려다 크게 추락했고 손목 뼈가 세 조각으로 부러졌습니다. 그렇게 제 등반 시즌은 갑작스럽게 끝났고, 해피 엔딩으로 이어지길 바랐던 코브라 크랙과의 관계는 다시 한번 극적인 전환을 맞이했습니다. 도무지 믿기 어려웠습니다. 운명이 저를 등진 것 같았고, ‘이건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먹잇감을 노리는 독수리처럼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가을이 끝날 무렵 훈련을 재개했고 겨울이 끝날 무렵에는 원래 기량을 되찾았습니다. 코브라 크랙을 등반하겠다는 생각은 저를 떠나지 않았지만, 포기하고 싶은 유혹 또한 강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꼭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열정을 계속 이어갈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코브라 크랙은 수많은 루트 중 하나일 뿐이었고, 저에게 반드시 등반해야 할 의무는 없었으니까요. 스쿼미시에는 작년에 눈여겨본 새로운 크랙 프로젝트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코브라 크랙 대신 이 새로운 라인들을 등반하며 손가락을 혹사시키는 데 훨씬 더 의욕을 느꼈죠. 과거로부터 배워야 할 문제도 있었습니다…
코브라를 둘러싼 이 모든 실패들이, 어쩌면 이제는 놓아줘야 한다는 신호는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앞서 언급했던 그 두려움이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자신보다 클지도 모르는 목표에 온 마음을 쏟아부었다가, 끝내 이루지 못했을 때 느끼게 되는 일종의 굴욕감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그 두려움은 나이 듦과 함께 더욱 커졌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젊은이’라 불리는 부류에 속하지 않았고, 쓸모없을 수도 있는 일에 기꺼이 시간을 허비할 자유를 가진 사람들 속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안에는 다른 무언가 남아있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끝까지 해내고 싶은 열망, 그리고 결승선을 통과하겠다는 투지였죠. 코브라 크랙 등반은 제 젊은 시절의 꿈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그랬습니다. 코브라 크랙은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크랙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크랙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오버행 직후의 수직 구간에 확보물을 설치하면, 다시 손목이 부러질지도 모를 추락을 피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안에서 어떤 책임감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들을 받았습니다. 첫째, 등반, 특히 크랙 등반에 대한 재능. 둘째, 다시 찾아온 두 번째 기회. 13년의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저는 비교적 높은 등반 실력을 되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코브라 크랙이 있는 스쿼미시에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응원해주는 클라이머들과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제게 주어진 이 재능과 기회들을 온전히 써서 끝까지 해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다시 한번 더 전념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몰입했죠. 전례 없는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했습니다. 제 운명을 통제하고 그 저주를 깨부수기 위해서였죠.”
한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그분’이라 부르던 코브라 크랙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프로젝트가 코브라 크랙이라는 걸 친구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앞서 말했던 두려움—실패했을 때 받게 될지도 모를 시선과 평가에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얼마나 오래 걸리든 상관없이 코브라를 완등하기 위해 다른 모든 프로젝트를 내려놓았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산 위로 돌을 굴려 올리는 새로운 시지프스처럼 보이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성공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용기와 헌신을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실패하더라도, 뒷말이 따라오더라도—그저 다시 암벽을 오르기 위한 시간. 그건 단순한 자유등반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아내기 위한 등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성공의 열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저에게 씌워졌다고도 할 수 있는 일종의 저주를 떨쳐내기 위해 요구되었던 영적인 여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두려움을 마주하고, 그 어느 때보다 깊이 헌신하며, 실패와 뒷말이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그저 즐기고, 최선을 다하고, 살아가고, 열정을 나누며,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는 어떠한 동기도 없이 그저 등반하겠다고 선택하는 것—그것이 성공의 열쇠였을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분명한 건 하나입니다. 코브라 크랙을 완등하는 과정에서 이토록 깊이 헌신하지 않았다면, 등반이 제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가르침 중 하나를 놓쳤을 겁니다.

- 디디에 베르토 (BD 앰버서더)
릴락19의 주요 작품인 ‘코브라와 심장’(The Cobra and the Heart)은 디디에의 20년간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담아냈습니다. 이 영화는 종교적 깨달음에서 가족의 배신, 싱글맘의 고군분투, 그리고 드물게 찾아온 두 번째 기회까지, 주인공 디디에의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ReelRockTour.com 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강적 크랙이 있습니다. 마치 코브라 크랙과 같이 전통과 역사가 깃든 크랙을, 서울 도봉산의 짱구 바위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짱구 바위는 국내 암벽 등반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입니다. 도봉산장 아래 약 15m 높이의 짱구 바위에 형성된 여러 크랙 루트 중에서도 특히 강적 크랙(5.13a)과 무당 크랙(5.11b)이 대표적이죠.

강적 크랙은 손가락만 겨우 들어가는 좁은 핑거 크랙으로, 1985년 러스 클런의 시도 이후 국내 프리 클라이밍 붐을 일으켰으며 1989년 김유형 씨가 최초 자유 등반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아주 긴 세월 동안 강적 크랙을 올랐다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지난 2015년에 최석문 씨가 재등을 하며 ‘강적 크랙 초등 후 26년 간의 정적’을 깨트렸습니다. 한편 이듬해 이명희 씨가 세 번째로 강적 크랙에 오르며 국내 트래드 클라이밍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이는 클라이밍 커뮤니티에서 잊혀지던 루트를 다시 주목하게 한 값진 순간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반면 무당 크랙은 상대적으로 폭이 넓은 오버행 크랙으로 다양한 재밍 기술을 요구하며 1987년 이의현 씨가 최초 등반했습니다. 짱구 바위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인공 등반 훈련장으로 활용되었고, 러스 클런의 방문 이후 강적 크랙의 자유 등반 시도가 국내 산악계에 프리 클라이밍이라는 새로운 조류를 전파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한때 강적 크랙 완등자에게 상금이 걸렸을 정도로, 국내 클라이머들이 한계에 도전하는 상징적인 루트였습니다. 이곳의 루트들은 단순한 난이도를 넘어 한국 크랙 등반의 역사와 발전을 함께해 왔고, 지금도 많은 클라이머들에게 도전과 열정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Editor’s Note.

블랙다이아몬드 도봉산점, 김지성 점장은 강적 크랙을 완등한 클라이머 중 한 명입니다. 그를 만나서 강적 크랙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어 보는 건 어떨까요?

BD 도봉산점에 대한 이야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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